2022 4분기 회고/기록

뒤늦은 작년 4분기의 기록

연말까지만 해도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어지럽게 산재되어 머릿속 어딘가 쳐박혀 있는데 차마 글로 옮길 엄두가 안났다. 돌이켜 보면 생각을 정리할 자신이 없는건 핑계고 그냥 글을 잘 쓸 자신이 없었다. 매일 뭐라도 쓰긴 하는데 발행 버튼을 누르기 까지 참 많은 생각이 오가면서 글을 비공개로 돌린 날이 많아졌다. 쌓여가는 비공개, 임시 저장된 글을 보면서 내가 왜 글을 잘 써야하지라는 원론적인 생각에 이르렀다.
불과 몇주 전의 일이다. 이제는 더 이상 글을 잘쓰려고 애쓰지 않는다. 중요한건 뭐라도 쓰는 것, 그리고 꾸준히 쓰는 것이라고 생각을 바꿨다. 2023년의 목표랄 건 없지만, 올해의 키워드를 꼽자면 꾸준함이다. 개 처럼 쓰더라도 꾸역꾸역 써내려 갈 것. 그렇게 쓰다보면 분명 어느 순간엔 달라진 스스로를 마주하지 않을까. 불확실한 미래에 베팅하는 건 누구나 똑같다. 하지만 그런 불확실함도 꾸준해야 마주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개발자 아닌가? 회고는 어느정도 감수성이 묻을 수 밖에 없는 글인데, 이걸 굳이 '잘' 쓸 필요가 있을까. 물론 잘 쓰면 좋겠지, 하지만 그게 최우선은 아닐 것이다. 누가 내 회고 글을 읽고 평론하는 것도 아닐텐데 뭘. 괜히 스스로 만든 잣대에 얽매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우를 범하지 않기로 한다.

10월, 11월, 12월 분명 무언갈 하긴 했는데, 남은게 없다는 기분을 씻어낼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그냥 아무것도 안했다고 인정하는게 나을 수 있다. 블로그에 쓴 글을 보고 당시의 내가 무엇에 집중했는지 역추론 해봤다.

10월

에...글 2개 썼네. 그나마 하나는 에러고, 다른 하나는 회고다. 뭘 했는지 파악할 수 없는 한달을 보냈군 ㅎ
뒤집어지게 잘 놀았다고 생각하련다.

티스토리에서 기록을 찾을 수 없다면 네이버 블로그를 봐야지! 역시 기록의 힘은 대단하다. 기록 예찬론자가 되야겠다.

10월엔 코틀린 스터디에 힘썼다. 그럼에도 기술 블로그에 코틀린의 ㅋ도 보이지 않는 이유는 11월 경에 탈주했기 때문이다... 할 말이 없다. 모두 내 불찰이고 능력 부족이다. 다시는 내 능력에 객관적 판단없이 일을 벌리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10월에 개발 외적으로 꽂힌 2가지가 있는데, 정세랑 작가님의 책 '시선으로부터' 와 tv프로그램 '환승연애'였다. 환승연애는 끝나고 나니 점점 잊혀지더라. 그래도 방영 당시엔 정말 재밌게 봤다. 무슨 방이었는데, 출연자들의 과거를 보여주는 방에서, 현재와는 사뭇 다른 과거를 마주한 출연자들이 눈물을 쏟아낼 땐 솔직히 그들이 부러웠다. 언제 그렇게 자신의 과거와 똑바로 마주하고 감정을 쏟아낼 기회가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는데.. 아무튼 재밌게 봤던 프로그램.
정세랑 작가님의 시선으로부터도 여전히 기억나는데, 한 사람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처음엔 너무 많은 등장인물에 "얘가 누구였지.." 하기 일쑤였는데, 점점 각 캐릭터의 사연에 흠뻑 젖어 친구들과 최애 캐를 뽑을 정도로 몰입했다. 이 무렵 즈음부터 한국 소설에 꽂혀서 독서량이 점점 늘고 있다. 며칠전만 해도 정세랑 작가님 작품에 빠져서 하나씩 탐독중이었는데, 어제 서점에서 심채경 박사님 책에 꽂힌 뒤엔 천문한 쪽에 슬슬 시동을 걸려고 한다. 아무튼 세상에 재밌는 책이 많다는 걸 알려준 시선으로부터 가 10월의 강렬한 포인트였다.

11월

? ㅋ 11월도 뒤집어지게 잘 놀았나보네....

11월엔 입사하자마자 진행한 개편 프로젝트 릴리즈가 있었다. 모든 스쿼드 인원이 근 3달을 개편 프로젝트에 혼을 갈아 넣었다. 릴리즈 당일, 내부 사정으로 롤백을 해야하는 사고 아닌 사고도 있었지만 결국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릴리즈 직전 백엔드 팀은 큰 사건을 맞이해야 했는데, 상용 배포 직전 스테이지 서버의 DB cpu 점유율이 100을 찍더니 도저히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도 좀 아찔하다... 극한의 쿼리 개선에 들어갔다. 그 당시엔 정말 극한이란 단어말곤 생각나지 않을 만큼 아찔한 상황이었는데, 돌이켜 보면 결국 어이없는 실수에서 발생한 슬로우 쿼리였다. 원인을 파악하고 급한대로 수정했다. 다른 팀원들도 각자의 코드에서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빴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새벽 2시가 됐더라. 누구 하나 싫은 소리 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를 지킨 덕분에 백엔드 팀 극한의 슬로우 쿼리 개선기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은 내게 2가지 믿음을 줬는데, 하나는 수분이 모두 말라버리는 듯한 아찔한 상황을 맞이해도 결국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줬다. 다른 하나는 팀원들을 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결속력은 아이러니하게 극도로 긴장되는 상황에 더 잘 형성된다는 것.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팀원들과 더 강하게 결속되고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이 생겼다. 아마 힘든일을 함께 겪으며 서로의 믿음이 두터워진 과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12월

음.. 뭘 쓰긴 많이 썼는데 영양가 있는 글이었는진 모르겠다. 그래도 12월엔 점점 상태가 나아졌나보다.

10월, 11월은 방황 아닌 방황의 시간이었다. 머리에선 뭐라도 해라고 계속 소리지르는데 뭘 해야할지 모르겠더라. 그저 인프런 강의를 찔끔찔끔 들으면서 뭐라도 하고 있다는 가짜 성취감에 살았다. 그리고 기록은 거짓말을 하지 않다는걸 반증하듯이, 가짜 성취감에 젖었던 10, 11월의 기록은 거의 남지 않았다. 그렇다고 12월이 대단히 나아진것도 아니지만..

12월엔 이사를 했다. 고시원을 탈출했고, 강남역 근처의 오피스텔로 거처를 옮겼다. 은행에선 생애 첫 대출도 받았고, 부모님 도움없이 부동산에서 전세 계약을 했다. 뭐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모든 처음엔 의미가 있다.
거주 환경이 바뀌면서 서서히 리듬을 찾아갔다. 아침을 챙겨먹기 시작했고 늦더라도 제때 자려고 했다. 간혹 개발하다 삘 받으면 통째로 밤을 새기도 했지만... 이건 전혀 리듬을 찾은 얘기가 아니네..?

이번 1분기는 어떻게 살 것인가?

1. 앞에서도 말했듯이 꾸준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할 것.
요즘 일기를 꾸준히 쓰고 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갖는게 생각보다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더라. 회사에서 갖는 부정적인 감정도 일기장에 털어내고 나면, 또 다시 마주한 부정적인 상황에서 이전과 다르게 대처한다. 물론 100% 나아지는 것이 어디있겠는가. 서서히 변하는 스스로를 인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기 쓰기라는 행위가 충분히 도움 된다고 믿는다. 이것도 결국 기록이네. 역시 기록 짱이다.

2. 계획을 세울 것. 계획을 세웠으면 다른 옵션이 생기더라도 눈길을 주지 말 것.
넥스트스텝의 ATDD 코스를 시작했다. 전부터 꼭 듣고 싶은 과정이었는데, 회사 백엔드 분들과 함께 수강할 수 있게 됐다. 이번 분기 목표는 ATDD 과정에 온전히 몰입하는 것. 투자한 만큼 제대로 뽑아내고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다른 쪽으로 신경을 분산시키면 안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한정된 집중력으로 제한된 시간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것도 해보고 싶은 내 욕심을 잘 안다. 하지만 몸과 뇌에 축척된 데이터가 늘 말해주지 않는가. 그렇게 살다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몰입도 있는 삶을 살아보자.

내가 원하는 미래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무엇을 원할지 자주 생각한다.
더 나은 연봉? 물론 원한다. 더 좋은 직장? 물론 원한다. 그런데 그걸 모두 이룬다고 했을 때 과연 나는 내 모습에 만족할 수 있을까? 그 때 되면 다시 더 좋은 회사와 더 높은 연봉에 눈이 돌아가지 않을까?
결국 인생은 끊임없는 욕망의 연속이다. 이 굴레를 끊으려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한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높은 연봉과 좋은 직장이라면, 이직 후에도 또 다른 이직을 위해 노력하겠지. 그 가치를 폄하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그러한 모습이 아니라는걸 이제는 알겠다.
나는 내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 "어떤 일"의 영역이 점점 늘어나길 바란다. 나를 명사형 꿈에 한정짓기 보다, 동사형 목표에 맞춰 키우고 싶다. 어떤 직장, 어떤 직책의 사람이 되겠다가 아닌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